브롬톤으로의 한 길 [더바이크]
Straight outta Brompton
브롬톤으로의 한 길
영국에서의 자전거 대량 생산은 거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서 런던 한 구석에 있는 가장 큰 자전거 제작자는 그러한 수요에 대처할 수 있을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접이식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
글 폴 롭슨(Paul Robson) | 사진 요셉 브랜스톤(Joseph Branston)
노팅힐 지하철 역에서 런던의 햇살 속으로 들어서 우리는 자전거를 펼치고 켄싱턴 궁전을 지나 하이드 파크, 메이페어, 소호를 거쳐 목적지인 코벤트 가든을 향했다. 여기에서의 ‘우리’는 사이클링 플러스와 브롬톤의 글로벌 브랜드 매니저인 로스 호킨스로, 이들의 자전거는 서 런던 회사의 훌륭한 휴대용 제품 2개로, 브롬톤의 그린포트 공장에서 TfL의 열기까지 우리 여행의 첫 부분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디자이너 앤드류 리치의 유명한 창조품으로 천재적인 제품이다.
브롬톤의 접이식 자전거는 도로 또는 철도 플랫폼에서 확실히 사용하기 편리했으며 아마도 당신은 이에 감동을 받고, 흥미를 갖거나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경악했을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들 중 일부는 이 사랑 받을 만한 제품에 대한 호기심도 별로 없고 출퇴근 시 이 제품을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 50,000대 정도의 판매와 매년 수제 제품이 서 런던 공장에서 제작되며 한 사람의 꿈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성공적 사업 사례에 놀라게 될 것이다.
“나는 브롬톤 이전에 하나에서 두개의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명가인 리치는 되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처음 자전거를 활발하게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내 일생을 이 프로젝트에 바치겠다고 기대하거나 의도하지는 않았다.”
“원래 계획이 사라졌을때, 앞으로의 유일한 길은 자전거를 독립적으로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77년 런던에서 탄생한 브롬톤 자전거는 발명가 리치의 창밖으로 보이는 켄싱턴 브롬톤 오라토리 카톨릭 교회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이 전에도 접히는 자전거는 존재했지만, 디자인과 영국 기관의 지속적 상표가 될 수 있을 만한 편의성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최초 접이식 자전거인 비커톤(Bickerton)에 투자자 중 한명이었다.”고 호킨스는 우리가 타고 있는 제품에 대해 설명한다. “엔지니어인 앤드류는 흥미롭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브롬톤의 리어 휠이 뒤쪽 아래로 접히면서 합쳐지는 것은 비커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브롬톤 디자인은 최초 시제품과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모든 구성요소는 많이 다르지만, 디자인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 상징적인 지위를 얻은 방법이다.”
앤드류는 자전거를 디자인했지만 결코 제조할 계획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아이디어는 누군가에게 그 디자인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이미 라레이와 같은 자전거 제조업체에서 잘 정립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얻은 대답은 그 아이디어는 흥미롭긴 하지만, 제조업체들은 그 시장과 아이디어 확장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고 호킨스는 말한다.
그 디자인이 가끔 일회용 그 이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회의론에 직면해, 앤드류는 현재 그 업계에서 발판을 마련하고자 모든 실마리를 가진 프레임 제작자를 찾아가 크라우드 펀딩을 했다.
“앤드류는 이 아이디어를 친구들에게 가져가 수백개의 자전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호킨스는 말한다. “그는 100명의 친구들에게 자전거를 구입하면 6개월 내 배달해 주겠다고 말했고, 회사가 성공하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하며 결국 무료로 자전거를 구입하게 하였다. 그는 1980년 첫 해를 맞았다. 그는 그들에게 제품을 만들어 배달하고 1993년 그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일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다.”
첫 번째 시제품은 앤드류의 주방 테이블로 제작되었고 크리스윅 공원에서 산업적 공유가 이루어 졌으며, 그 후 서 런던에서 수제로 제작되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여전히 아시아가 아닌 런던에 있는지 묻는다.”고 호킨스는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앤드류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유용한 제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런던에 살며 열차를 통해 자전거가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 런던에 기반을 둔 이유는 그가 켄싱턴에 있는 역사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큐와 키스윅도 바로 이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그 지식을 가진 직원수 또한 증가했으며, 아웃소싱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우리는 이제 런던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곳에서 지속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
공장에서 우리는 ‘조립된’ 제품보다 더 많은 철로 된 수제 튜브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브레이징 영역은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정된다.” 호킨스가 덧붙인다. “프레임은 한쪽 끝에서 시작하여 다른 작업이 수행되는 각 셀을 따라 이동한다.”
“각 지그 장치 각각은 다른 일을 하도록 설정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업 각 부분마다 한 명씩이 필요하다. 1980년대에는 공학 도면을 직접 그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앤드류가 작업 공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그는 자전거의 외관 방식과 그 구성 부분인 메인 프레임, 포크뿐만 아니라 각 공구, 각 지그 장치들까지 직접 그려야 했다. 그래서 자전거와 관련된 수백 개의 도면뿐만 아니라 제조 및 공구와 관련된 수백개의 도면도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그 장치 각각은 앤드류가 설계한 디자인이거나 원래 디자인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접이식 자전거만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전체 제조 공정까지 디자인 한 것이다.”
브롬톤의 브레이저는 모든 현장에서 테스트 했으며 국내에서 최고이다. “우리는 용접 및 비용접을 배경으로 사람들을 데려온다.”고 호킨스는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브레이저 기술자를 찾기 힘들었다. 그 기술은 시들어가는 기술이고 충분한 훈련을 받은 브레이저를 고용하고 있어야 했지만, 한 때 생산이 중단되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전거를 공급할 수 없었다.
“자전거 판매를 두 배로 늘리고 싶다면 우리와는 다른 사업 분야와 함께하여, 그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두 배로 늘려야 하나, 모집 기관을 통해서도 자격을 갖춘 10명의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직접 훈련시키고 경험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더라도 18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릴 수 있었으며 그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작업 할 수 있어야 했다.”
“브레이징은 용접보다는 고온 납땜과 비슷하다. 이것은 두 금속 조각을 함께 용접하면 가열되는 단순한 과정이지만, 단조된 끝부분을 납땜으로 모아 접착제의 역할을 하는 제 3의 금속으로 접착역할을 해 두개의 금속을 붙여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가장 숙련된 분야 중 하나는 바텀 브라켓 제조로, 이것은 엄지손가락과 같은 효과를 내는 아주 강한 접합부를 제작하는 필렛 브레이징 기술을 사용한다. 바텀 브라켓은 매우 강해야 하며,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게 제작하는 것이 진정한 기술이다.”
“라인의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신의 도장을 찍기 때문에, 자전거의 여러 부분에서 어떤 사람이 납땜처리를 했는지 알 수 있으므로 품질 관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고유의 필기체와 같이 서로의 제품을 알기 때문에 도장을 볼 필요는 없다.
공장 바닥 반대편에는 조립 라인이 있으며, 각 제품은 주문 제작된다(브롬톤 웹사이트 - brompton.co.uk 에서 직접 제품을 설계하라). “항상 최종 사용자가 설계하는 것은 아니다.”고 호킨스는 덧붙인다. “때로는 숍이나 배급업자가 설계를 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많은 제품들이 조립된다. “198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앤드류는 훌륭한 규모의 사업체로 키웠다.”고 호킨스는 설명한다. 약 10-15,000대의 제품을 만들었고, 2007년에는 엔지니어링 팀의 일원으로 브롬톤에 입사해서 자사주매점을 이끌었던 윌 버틀러 아담스가 현 CEO를 맡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로 초점을 맞춰보면, 앤드류에 의해 제작된 자전거가 거의 대부분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좀 더 외향적인 변화가 있었다. 윌은 영업 및 마케팅에 더 많은 투자를 했고 제품을 시장으로 퍼뜨리고 있다.
“현재 우리는 연간 50,000대의 자전거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 중 3/4을 43개국에 수출하고 있고, 그렇게까지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자 그것은 모두가 놀라는 제품으로 변모하였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디자이너를 도입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라고 말하고, 결국 모든 것이 자전거에 이입되어 그대로 탄생하게 되었다.”
발명자인 리치는 계속 말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끔찍한 좌절의 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좌절들이 희망으로 나타나기 시작되었고, 허가를 받는 것이 상업화하기에는 좋았겠지만, 나는 브롬톤이 생산되고 사용자에게 제공되는 방식을 통제하는 작은 조치로 인해 성공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전기 브롬톤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연구 및 개발 부서를 통과하면서 기밀로 제작된 제품으로, 접이식 자전거에 전력을 더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준비가 완료되면, 도시의 거리에서 두 개의 휠로 다니는 편이 편리하기 때문에 이 작은 제품이 더욱 유행할 가능성이 크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잠재적 라이더들을 만들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아직도 싸움을 멈출 수 없는 도시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더 다양한 제품들이 생길수록 좋다. 위험한 도로를 다니는 교외로의 출퇴근자들은 전기 브롬톤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바퀴로 균형을 잡도록 도움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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