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경 선수
표피를 지나 진피에 도달하기
여자를 만나다, 최혜경 선수
실업 9년차. 지난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 산악자전거 크로스 컨트리 경기에서 4위에 머무르며 아쉬움과 동시에 가능성을 함께 안겨주었던 최혜경 선수를 만났다.
잠깐의 휴식기를 갖고 있는 그녀와 푸른 5월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수다를 떨고 왔다.
editor 송해련 photo 이성규
그녀가 보였다. 두려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는 눈빛,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다리, 딱 달라붙은 서울시청의 팀복을 입고 자전거를 끌며 걸어오는 그녀는 누가 봐도 자전거 선수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겉모습일 뿐이다. 표피를 지나 그 아래 진피에 도달하면 그녀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
실업 9년차. 지난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 산악자전거 크로스 컨트리 경기에서 4위에 머무르며 아쉬움과 동시에 가능성을 함께 안겨주었던 최혜경 선수의 첫 인상은 끊임없이 자전거를 위해 달려온 운동선수의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저 사실 인터뷰에 응해놓고 고민이 많았어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제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 자신이 없었거든요. 더구나 요즘 재활훈련을 하며 쉬고 있는 중이라 살이 좀 쪘어요. 포토샵으로 보정해주실 거죠? 머리는 올리는 게 나아요, 아님 푸는 게 낫나요?”
첫 대면에서 최혜경 선수가 던진 이야기에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멋지고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매, 웬만한 남자 선수들도 부러워할 할 만한 출중한 자전거 실력까지 두루 갖춘 그녀 속에는 스물여덟, 이십대의 마지막을 건너고 있는 여자가 숨어 있었다.
동전의 양면같은 여자 운동선수로서의 삶
최혜경 선수는 선수생활 14년, 올해로 실업 9년차를 맞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시청 여자 사이클 선수로 스카웃되었고, 3년간의 천안시청 소속을 거쳐 현재는 다시 서울 시청 소속 실업선수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이클 여자선수가 갈 수 있는 실업팀은 많지 않다. 더더구나 MTB종목 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팀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실력이 좋아도 자리가 없으면 자전거를 접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인 것이다. 하지만 최혜경은 그 바늘 구멍같은 작은 틈을 통과해 당당히 도로 사이클과 MTB 국가대표선수가 되었다.
“순탄한 길은 안전하지만 어쩐지 재미가 없는 것같아요. 지금까지 자전거 선수로서의 길을 돌아보면 너무 거칠고 힘들어요. 더구나 분명 저의 자의로 시작한 일인데 지금까지의 길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흘러온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 평범해지길 거부하고 고생을 자처한 여자 운동선수들을 만나면 궁금해진다. 구지 여자와 남자를 가르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자 운동선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쉬운 선택이 아니다. 서른을 넘겨 운동선수 생활을 하는 것도 힘들고 결혼은 곧 은퇴를 뜻하기도 하며,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요즘처럼 불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여유로운 때가 없었던 것같아요. 운동하고 처음으로 긴 휴식기를 가졌어요. 심한 훈련 탓에 몸에 이상이 오면서 코치님과 상의 끝에 재활의 기간을 가져보자고 했거든요. 예전에는 아파도 쉬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고, 다시 몸을 끌어올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많았어요. 최근 운동량을 좀 줄이고 대체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체불명의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예전과는 다른 고민 속에 살고 있기도 해요. 내년이면 실업선수로 10년이잖아요. 잠시 쉬면서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시간이에요. 그러고 보니 쓴맛 단맛, 빛과 그림자, 그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구요.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여자 운동선수로 살면서 천형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무게들을요.”
도전,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하는 일
최혜경 선수는 전남 나주 출신이다. 고무줄놀이를 유난이 좋아했던 여자아이, 동네에서 달리기라면 꽤 알아 줄만큼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아이는 초등학교시절 달리기는 물론, 장대높이 뛰기에 투포환까지 운동이라면 뭐든지 잘하고 좋아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본능적으로 운동감각을 타고 났고, 더구나 승부근성도 있어 지는 것도 싫어했다.
“영산포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체육선생님이 운동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초등학교 때 운동 좀 했다는 아이들 속에서 뽑혀 사이클팀에 들어가게 되면서 선수의 타이틀이 시작된 거죠. 누구나 그 나이에는 별 생각 없이 운동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지 않나요?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사명감도 없이 그냥 운동을 좋아하니까 시작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로 이어졌죠. 고등학교 때 잠시 운동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이미 늦은 것같은 거예요. 이게 내 운명이다 받아들이고 나니 어느 순간 실업팀 선수가 되어 있고 국가대표가 되어 있더라구요.”
이렇게 말해놓고 최혜경 선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인터뷰에 이렇게 밋밋하고 재미없게 이야기하면 안되는 거죠?”하고 되물어 오더니, “그런데 뭐, 이게 사실인걸요.”하며 이내 급커브를 틀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MTB를 타게 된 것도 그래요. 가끔 사람들이 왜 사이클에서 MTB를 타게 되었느냐고 물어오곤 하는데, 트랙과 사이클만 타던 제게 서울시청 감독님이 MTB를 한 번 타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이유는 단 하나, 언덕에 강하니까. 그리고 언덕을 좋아하니까. 그때도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것같아요. 산은 언덕이 많으니까 잘 탈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진짜 사이클과 MTB는 천지 차이더라고요. 포장된 도로와 비포장 도로의 차이는 넥타이 메고 출근하는 회사원과 현장직 노동자와 같은 차이랄까요? 무서워서 처음에는 울기까지 했어요. 부상도 많았고요. 그런데 처음 출전했던 왕방산 챌린지대회에서 1등을 하고, 2009년 전국체육대회 산악자전거 여성부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더구나 아시안 게임이라는 목표가 생기니 정신이 번쩍 들었죠.”
무심한 듯 그녀의 시간들을 들려주고, 무언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 그녀의 이야기에 점점 더 흥미가 갔다. 트랙과 도로선수로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내던 선수의 MTB로의 전향, 긴 선수생활에 비해 MTB선수로 3년차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드라마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들에게 아시안게임, 올림픽은 최고의 목표죠. 그 어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명예이자 목표이자, 도전일 거예요.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말 선수로서 고통스러웠지만 또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확실한 목표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저와 운동만 생각했어요. 운동하고 시합에 출전할 때는 이기적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시합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저 자신 하나뿐이죠. 시합을 준비하면서 최대한 집중해 마인드 컨트롤과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요. 잡생각이 들 틈이 없이 말이죠.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정신이 흐트러질까봐 다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어요.”
광저우 아시안게임, 다푸샨 일대 산악 험로 5.3km 코스를 6바퀴 도는 여자부에서 최혜경 선수는 아시아 산악자전거 강국 중국과 일본 선수 사이에서 분투했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중국의 런청위안, 스칭란이 1, 2위를 차지한 가운데 최혜경은 2시간5분13초의 기록으로 일본의 가야마 리에(2시간1분15초)에게 4분가량 뒤진 4위를 차지했다.
“별다른 테크닉이 필요 없는 도로 사이클과 달리 산악자전거는 다양한 테크닉이 필요하고 대회 코스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험로였어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이기는 해요. 하지만 저만의 스타일을 찾고 도전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인생의 가장 찬란한 한때였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쉬움을 내비치는 모습 속에는 사실 그녀가 인터뷰 초반에 풀어놓았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해져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의 몸을, 자신의 성적을 먼저 걱정하고 챙기지만 최혜경 선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 여자 MTB의 미래였다.
“MTB 여자 선수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실력이기보다 선수층이 얇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현재로서는 전국체전 종목에서 여자 MTB 종목이 빠져 있는 상태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여자 MTB선수층은 날로 얇아지고 있어 경쟁할 선수들이 많지 않잖아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게 만들거든요. 곽미희 선배처럼 MTB선수로서 긴 생명력을 갖고 싶기도 하고 후배들에게 저의 성장 경로가 힘이 될 수 있었으면 하지만 현실은 늘 좌절과 희망을 오가게 만드네요.”
그녀의 말끝에서 새삼 희망과 시련,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지속과 쉼표처럼 우리의 삶에는 늘 희비가 세트로 닥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더해갈수록 자신의 인생에서 골인할 지점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중요한 것은 도전과 자신감인 것 같아요. 힘든 종목이지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열정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도 후배들에게는 힘이 될테니까요. 생각해보면 운동선수들은 도전하는 삶이 일상이잖아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그러면 결과에 멋지게 승복하는 마음도 알게 되구요.”
자전거는 끝날 때까지 끝낼 수 없는 운명
도전하는 여자들은 흔치 않다. 그러나 도전을 일상으로 알고 사는 그녀는 이미 성공한 운동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스물 여덟. 한창 예쁘고, 사랑과 연애를 반복하며 푸르고 설레이는 나이를 보내야 할 시기에 불안과 초조와 실패와 도전, 희망과 좌절을 덧입히며 사는 그녀가 잠시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 나름대로 그녀에게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내고 있음도 확인했다.
“아직 클럽이라는 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땀 흘리고 운동하는 것이 일상이기에 술 한잔을 마셔도 그것이 고스란히 육체와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니까 다른 데는 눈을 돌린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책도 많이 읽고, 음악도 많이 듣고, 맛있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예뻐지는 법에도 물론 관심을 갖죠. 연애요? 아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저도 연애는 했어요. 살아가는 일이 그래요. 언제부터인가 나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오래토록 맺어 왔던 인연의 끈이 갑작스럽게 뚝 끊어져 버린 시간들이 와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길든 짧든 이별이란 단어에는 가슴 뭉클한 아픔이 있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에요. 언젠가는 가정도 꾸려야 하고, 아이도 나아야 할 것이며 자전거 선수가 아닌 ‘여자 최혜경’으로 살아야 할 날이 곧 오겠죠? 선수로서도 더 성공을 거두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어요.”
낯선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고백했지만 최혜경 선수와 꽤 오랫동안 벤치에 마주 앉아 솔직함이 담긴 수다를 떨었다. 때로는 앙칼지고 때로는 부드럽게 세상에 부딪치는 법을 알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선수로서도 여자로서도 꼭 성공하라는 당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팀 유니폼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푸른 재킷이 너무도 잘 어울리듯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삶을 찾아갈 것이며, 지금처럼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정리하려고 하자, 그녀가 결국 다시 자전거 이야기를 꺼낸다.
“자전거 때문에 갈팡질팡 중이라고 했지만 제가 자전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자전거는 저와 가족, 친구, 선배, 후배를 이어주는 소통이며 유대감이며 건강이고, 사랑이거든요. 또 저 개인에게는 미래고 꿈이고요.”
그녀에게 자전거는 끝날 때까지 끝낼 수 없는 운명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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