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천사 우근철
아주 아주 청춘스럽게
제법 따뜻한 자전거 여행
우근철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우근철(28)은 지난 여름, 서울 홍익대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아이들에게 자전거 선물을 위한 기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의 기부 모금의 매개체는 판토마임, 전국 거리공연을 통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저소득층, 섬지역, 다문화가정 등 어린이 100 명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는 것을 목표로 떠난 여행이었다. 35일 간의 일정으로 떠난 이 여행의 테마는 “제법 따뜻한 여행”. 거금의 기부도, 멋진 공연도 아니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부 여행의 의미를 그 나름대로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editor 송해련 photo 이성규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문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 때론 걷다가 때론 뛰다가, 그렇게 멈칫하는 순간에 숨을 토해내며 잠깐의 현기증이 일기도 하고, 현실에 체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변화를 꿈꾸기도 한다.
우근철을 만났을 때, 그는 그 순간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끄집어냈다. 광고쟁이 1년차, 한 달에 두 번도 집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밤샘에 시달리는 일의 연속성 상에서 모니터 앞에서 졸다 깨어 상사의 눈치를 보며 졸지 않은 척, 일하는 척 마우스를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매번 그런 순간 마다 마음으로 사표를 썼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작업 중이던 CF 속 인도의 어느 곳이 그를 더욱 큰 한숨을 몰아쉬게 했고, 그가 늘 꿈꾸던 인도로의 여행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바로 상사에게 퇴직 의사를 밝혔고 그의 마음이 흔들릴까 무서워 바로 그날, 한 달 후 떠나는 인도로의 티켓을 예약했다.
여행에 대한 철학과 상상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순례, 누군가에게는 기록, 누군가에게는 감동…. 그의 여행의 시작은 늘 깊은 숨에서 시작되었다. 따뜻하고 차갑고, 격정적이고 편안한 숨. 그가 몰아쉬는 숨의 의미는 매 순간 달랐지만, 진정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 떠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한마디로 멈출 수 없는 이야기, 그 자신은 물론 또 다른 누군가의 감동·상상·모험·도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삐에로 광대 분장을 하고 무언의 손짓과 표정으로 1000원 짜리 거리 공연 모금을 시작한 그의 ‘제법 따뜻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근철(28)은 지난 여름, 서울 홍익대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아이들에게 자전거 선물을 위한 기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의 기부 모금의 매개체는 판토마임, 전국 거리공연을 통해 모아진 기부금으로 저소득층, 섬 지역, 다문화가정 등 어린이 100 명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는 것을 목표로 떠난 여행이었다. 35일 간의 일정으로 떠난 이 여행의 테마는 “제법 따뜻한 여행”. 거금의 기부도, 멋진 공연도 아니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기부 여행의 의미를 그 나름대로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여행에서 돌아와 있고, 비영리 사회공헌단체인 ‘사랑밭 새벽편지(www.m-letter.or.kr)에서 여전히 간사로 근무하고 있다. 사랑밭 새벽 편지는 200만 독자에게 감성 메일을 보내며 긴급구호, 봉사동아리 등 우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와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공헌단체이다.
그를 만났다. 그리고 스물여덟 해 동안 그가 떠났던 길 위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과감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누구나 한번 쯤 다 두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이런 저런 생각과 상황에 마음이 얽매여 길을 잃고 헤매일 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싶을 때, 그냥 그것이 인생이라고 눌러 앉고 싶을 때 한 편에서는 늘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서울예대 광고창작학과의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절, 어떤 길로도 선택할 수가 없었어요.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었고, 취업을 위한 소위 스펙도 없었죠. 그렇다고 토익 점수에 목을 메며 살고 싶지도 않았고 인생의 목표가 대기업이 되기도 싫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불안함이 에워싸고 있을 때, 일단 떠나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나서 다시 시작하자고요. 그렇게 저의 첫 번째 여행,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비행기 값을 제외하고 남은 여행 경비는 딸랑 15만원, 900km가 넘는 산티아고 순례기를 여행하기에는 무모하리만큼 모자란 경비였다. 아직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하루에 7유로도 하지 않는 숙박비를 낼 돈도 없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여비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는 선택해야 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돈을 송금 받아볼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빌붙어 볼까? 돈 많은 여자를 꼬셔볼까? 어처구니없는 별별 생각들이 스쳐갔지만 그는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챙겨왔던 분장크림과 흰 면장갑, 그의 표현대로라면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에서 얄팍하게 배웠던 판토마임 공연을 그의 마지막 희망으로 붙잡았다.
“송금 받고 싶어도 전화 걸 카드조차 없었고, 같은 순례자에게 빌붙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울고 불며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무리수를 둘까도 생각했지만 어느새 제가 판토마임으로 거리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 같아요.”
그의 절박함과 진정성이 담겨있었기 때문인지 거리를 지나던 순례자와 현지인들이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속에 삐에로 분장을 한 그가 멈춰서 있고, 때로는 무언의 표정과 몸짓을 하면 그에게 작은 성의를 표했고,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전해주었다.
그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 그는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여행의 힘은 자신감을 주었고,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주었다. 그렇게 광고회사 AD로의 일 년 남짓, 그가 모니터 앞에서 또 다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다시 찾아오며 그는 다시 인도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인도는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의 공간이잖아요. 그냥 막연히 인도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도 스페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무모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가서 어떻게든 부딪치면 되겠지. 7개월 정도 인도 여행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마더 테레사가 세운 마더 하우스에서 볼런티어 활동을 하며 인생에 있어 ‘나눔’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여행 중 그는 마더 하우스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판토마임 공연을 하며 나눔의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 찾아갔을 때 영어도 서툴렀고, ‘판토마임’이라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그의 거리 공연 사진을 보여주며 기회를 얻었다. 말없이 눈빛과 표정, 몸짓으로 전하는 판토마임은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아 더욱 진심이 전해졌다.
“판토마임은 상상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어린아이들의 눈빛과 호흡을 느끼면서 소통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었죠. 얄팍하게 배운 실력이지만 그때 테크닉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제법 따뜻한 여행’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었던 것 같아요. 인생에서 나누며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이죠.”
어느 젊은 광대, 나눔의 의미를 알다
우근철은 인도에서 돌아왔지만, 또 다시 일상의 막연함이 그의 목을 조였다. 그리고 그의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에는 밤새 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나름대로 그의 책에 대한 기획서와 샘플 원고를 가지고 70 여 군 데의 출판사에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매번 거절의 순간을 맛보아야 했고, 그의 이야기를 읽어주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제가 광고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상사에게 찾아갔던 날, 그만 두고 뭐 할래 라고 물어오는 상사에게 여행 후 책을 쓰겠다고 했었어요. 상사의 비웃음과 가서 일이나 하라고 하던 그 순간을 기억했던 것도 있지만, 인도 여행 후 저의 인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늘 어려웠던 가정 형편, 30 년 가까이 거리 행상을 전전했던 어머니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아버지가 커다란 얼음에 깔려 다리를 다치시면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취직하고 돈을 벌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순간,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너의 인생이 일 년의 반은 여행을 하고, 일 년의 반은 일을 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시장 한 켠에서 여전히 행상을 하는 어머니의 삶이 이제는 네가 그만두라고 말해도 그만 둘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요. 소일삼아 시장 사람들과 오래된 단골들과 만나며 어머니 자신에게도 그 일을 여전히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고 하시며, 저의 삶에 자신을 가져도 된다고 말씀해주시는 거에요. 효도도 하고 싶고,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삶이 그저 물질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몰려있던 그의 삶에 또 다른 기회를 맞았다. 책 출간 기획서를 가지고 만났던 출판사대표는 내부적인 검토를 해보겠다고 말했지만, 그 순간에도 무리수를 두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내일 다른 출판사와 미팅을 앞두고 있고, 그 곳에서 출판의사를 밝혀왔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저 미팅만을 앞두고 있었지만 출판계약을 할 것이라고 말해놓고 나니, 출판사 대표는 그 자리에서 출판계약을 했다. 그렇게 그의 여행이야기를 담은 <어느 젊은 광대의 이야기>가 부즈펌을 통해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정말 어렵게 책이 출간되고, 책이 나오고 나니 정말 작가들이 왜 책 출간을 ‘산고’에 비교하는 지 알 것 같았어요. 정말 자식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또 한 번 무언가 다른 꿈에 도전하고 싶어졌어요. 그 즈음 ‘제법 따뜻한 여행’을 기획하게 된 거죠. 거리 공연을 하며 모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겠다는 저의 여행이 그 때 시작된 겁니다. 사실 이 여행에는 저의 자식 같은 책에 대한 홍보도 함께 해야 겠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공주쯤 내려갔을 때 친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여행은 중단되어 버렸죠. 그때까지 모인 돈이 40만 원 쯤 되었는데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통장에 만원, 이만 원 씩 보내준 사람들을 생각하니 빨리 처리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 저기 알아보았는데 현금을 보내라는 곳은 많아도 자전거를 받겠다는 곳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 임의대로 무작정 자전거를 사서 보내버렸죠. 그런데 막상 그 때를 생각해보면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겠다, 떼어내어 버려야 겠다라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는 사실 아이들에게 돈을 보내는 것보다, 옷이나 생필품을 보내는 것보다 자전거를 선물해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전거는 여행의 매개체가 되어 주기도 하고, 눈 높이를 바꾸어 세상을 바라보게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가 되어 주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이후 그는 자전거를 보냈던 곳에서 어렵게 그를 찾아내어 아이들이 감사의 마음을 적은 편지들을 보내온 순간, 다시 그 자신을 보게 되었다. 정신없이 떼어버리려고 했던 마음, 책 홍보의 수단으로 했던 마음이 미안해지며, 다시 한 번 ‘제법 따뜻한 여행’을 시작해야 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운명, 아니 숙명처럼 나눔을 실천하다
그리고 그가 일하고 있는 ‘사랑밭 새벽 편지’의 도움을 받아 올 여름 다시 전국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그의 여행이 늘 무모했듯이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영상으로만 펑크 대처법을 배우고 떠났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 하나, 코펠, 옷 두벌 정도만을 챙겨 다시 판토마임 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올 여름, 유난히 비는 세차게 내렸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무더위가 그를 괴롭혔다.
“펑크로 인해 엄청 고생을 하면서 때우는 법을 배웠고 사실 거리 공연을 하는 것도 여전히 익숙지가 않았어요. 거리에서 저의 옷을 벗고 광대 옷으로 분장을 하는 그 순간은 여전히 창피함이 몰려와요. 그러나 15분 정도 얼굴에 분칠을 하고, 과장된 붉은 입술을 그리고 웃옷을 벗고 거리 서면 그때는 정말 광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저를 노숙자 취급을 하기도 하고, 술 취한 걸인이 옆에 와서 춤을 추기도 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때로는 어색하게 저의 공연을 바라보며 쭈뼛쭈뼛하며 지갑을 여는 그 모습은 또하나의 공연이 되어 아주 새로운 공간감을 연출해요.”
그렇게 모아진 천원 짜리들은 다시 자전거가 되어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100대를 목표로 떠난 여행에서 목표를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의 진정성이 담긴 여행은 꽤 많은 아이들에게 자전거가 친구가 되어주는 의미를 만들어 주었다.
그가 이야기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발린 듯이 이야기 하는 말이 될 지도 모르지만, 그가 읽었던 <나무를 심는 사람>의 한 구절처럼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즐거움을 한 사람, 한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나누는 일을 통해 자신이 더욱 행복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최근 우근철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총 재산을 털어 DSLR 카메라를 구입했다. 400만 원의 거금을 들여 구입한 카메라를 들고 주말이면 시장과 세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삶의 모습을 그의 블로거(해피소드 봉사동아리 블로그 http://limit012.blog.me / 우근철 페이스북 계정 limit012@naver.com)와 그가 일하고 있는 ‘사랑밭 새벽 편지’ 를 통해 전하고 있다. 내년 1월에는 사랑밭 새벽 편지를 통해 만난 인연들과 인디아 여행을 떠날 예정으로 있다. 새벽편지와 함께 떠나는 테마여행의 일환으로 기획된 인디아로의 여행은 그곳에서 함께 나눔을 실천하고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함께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자신에게 정직해 지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운명처럼 아니 숙명처럼 수순을 밟아온 그의 나눔은 세상을 조금, 그리고 제법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를 만났다. 그리고 나또한 제법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Thank you! 당신에게 감사를.
[이 게시물은 장한수님에 의해 2012-06-12 20:04:05 월간더바이크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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