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달라고 소리쳐
손님은 왕이거나 때로 폭군이거나
웹상에서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삼성서비스센터에서 단말기 교환받기’라는 제목이다. 내용은 이렇다. 하나, 삼성서비스센터에 들어간다. 둘, 단말기를 던지면서 바꿔달라고 소리친다. 셋, 바꿔줄 때가지 우긴다. 당사 직원으로서는 웃을 수가 없는 내용이겠지만, 실제로 이것이 종종 통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실소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블랙 컨슈머란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자 고의적으로 악질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이 단어의 출처가 불명치는 않으나 외국에서 ‘블랙 컨슈머’란 일반적으로 ‘흑인 소비자’를 지칭한다고 보았을 때, 이것은 한국에서 유독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드롬이라고 추측된다. 한때 개그 프로그램에서 “바꿔줘. 브라우니, 물어!”라는 유행어의 탄생은 바로 이 블랙 컨슈머에 대한 인식이 수면 위로 올랐음을 뜻한다.
‘손님이 왕이다.’라는 문구와 같이 한국에서 서비스업은 양보를 넘어 희생에 가까운 개념이다. 이는 손님에 대한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무한한 충성심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기실 블랙 컨슈머란 이러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가장 나쁜 증상 중 하나이다.
소비자와 판매자의 온도차
자전거 업계라고 별 수 있을까. 블랙 컨슈머까지는 아니지만, 업계 애프터서비스팀의 종사자들은 손님과 겪는 비화에 대해 토로하곤 한다. 이른바 ‘진상 손님’이라는 것인데, 대개 워런티 규정에 대해 잘 알아서 따지기 보다는, 규정을 잘 모르고 찾아와 공연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럴 때 규정과 객관적인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도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디스트리뷰터가 일정부분의 손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손님과 판매자가 규정에 의거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손님이 왕이라는 풍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나라별로 국지적인 예외 조건이야 있겠지만, 자전거 제조사가 제시하는 국제 워런티 규정은 엄격한 편이라고 수입사 마케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먼저 무상 수리를 보증하는 워런티는 1차 구매자에 한하며 이를 엄격히 준수한다. 만약 정품등록을 하지 않았거나 영수증을 분실해서 자신이 1차 구매자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워런티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왜 2차 사용자에게는 워런티 보증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2차 사용자는 해당 제품을 적절한 용도로 사용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딜러에게는 소비자에게 적합한 제품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2차 소비자의 경우는 딜러가 아닌 제3자를 통한 구매이기 때문에, 2차 소비자가 해당 제품을 적절한 용도로 구매한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몸무게가 120kg인 손님이 숍에 와서 한계 체중이 100kg인 로드바이크를 구매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딜러는 제품의 한계체중을 밝힌 후 해당 제품을 팔지 않거나, 그에 적합한 다른 제품을 권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는 오프로드를 주로 달리는 사용자에게 포장도로를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자전거를 파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반면 2차 구매자와 1차 구매자 사이의 거래에서는 이런 의무사항이 지켜졌는지 확인할 길이 만무하다.
재미있는 것은 영미권 소비자들은 코스메틱 이슈, 즉 도장의 부분 변색이나 흠집에 대해 소비자가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의 소비자가 영미권 소비자들과 가장 큰 차이는 외관의 문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많은 브랜드의 국제 워런티 규정에는 심각한 경우가 아니라면, 프레임 도장에 생긴 약간의 흠에 대한 워런티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소비자들은 처음 샀을 때 외관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만약 외관상 하자가 발견되면 성능에 문제가 없어도 교환을 요구한다. 제조사 입장에서도 나라별 소비성향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편이어서, 비록 제조사가 제시한 국제 워런티 규정을 권장하기는 해도 디스트리뷰터나 지사의 요구에 따라 변용되는 조항들이 더러 있다.
브랜드별 워런티 규정과 한계
1. 기대수명과 워런티 기한
그렇다면 각 브랜드별 워런티 규정은 어떻게 될까? 필자는 국내에 자전거 및 컴포넌트를 판매하고 있는 26개의 디스트리뷰터 및 제조사에 이메일을 통해 설문지를 보냈다. 그중 11개의 디스트리뷰터가 설문에 응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설문조사로 한국 내 자전거 브랜드의 워런티 규정을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해당 제품의 워런티 규정을 이해하는 것에는 유의미한 자료일 것이다.
워런티 규정에는 몇 가지 소모품과 휠셋과 서스펜션 포크 등의 부품 부분, 프레임에 따른 분류가 존재한다. 소모품에 대한 워런티는 없거나 1년 이하로 상당히 짧다. 소모품의 특성상 마모로 인해 수명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충격에 자주 노출되고 움직임이 많은 휠셋과 서스펜션의 포크는 2년에서 3년 사이가 보통이다.
프레임의 워런티 기간은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제조사별로 각양각색이기도 하며, 같은 제조사라도 프레임의 재질과 용도에 따라 기간이 다르다. 다른 부품들도 그렇지만 재질과 용도에 따라 기대수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통상 워런티 기간은 해당 프레임을 주어진 용도로 썼을 때 얼마만큼 사용할 수 있는지 유념하고 정해진다. 대체적인 경향을 살펴보자면 MTB, 그중 다운힐, 프리라이드, 더트 점프 등 과격한 움직임을 소화하는 프레임은 하드테일과 로드바이크에 비해 기대수명이 짧으므로 워런티 기간 역시 짧다. 또한 탄성이 적은 알로이 프레임은 카본이나 크로몰리 프레임에 비해 피로파괴현상이 빨리 오기 때문에 워런티 기간이 짧다.
어떤 제조사는 특정 부품에 대해 라이프타임 워런티를 보장하기도 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라이프타임 역시 제품의 기대수명에 근거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이프 타임이 적용된 카본 프레임은 예상되는 한계수명까지 품질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라이프타임 워런티는 대상이 한계수명을 지나 파괴될 때까지 기능상 오류를 책임진다는 뜻으로, 제품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과 소비자에 대한 양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2. 병원 다녀오니 인상이 변한 자전거
워런티에 의해 무상수리가 적용되면 제조사 및 디스트리뷰터는 결함이 있는 부품을 새 것과 교환한다. 이때 수리업체는 이전 것과 비슷한 등급의 부품을 사용하거나 그보다 상급으로 교체한다.
부품을 교체할 때, 의외의 복병이 바로 부품의 색깔이다. 수리하는 입장에서는 전과 비슷한 색깔의 부품을 준비하려고 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다른 색으로 교체한다. 워런티 규정에는 명기된 조항이지만 이 점은 수리 이후 소비자와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3. 비운의 중고차 구매자들
중고 자전거 거래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시세는 적정한지, 거래자는 믿을만 한지, 물건은 확실한지 알아보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지만, 의외로 간과하는 점이 워런티 권한 양도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제조사는 워런티 권한은 양도가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워런티는 1차 구매자에 한하며, 2차 구매자는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 해당 제품을 권장하는 용도로 사용했는지 불분명하고, 1차 구매자가 2차 구매자에게 양도하기 전에 소비자 과실로 인한 고장이나 사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차 구매자 입장에서는 억울한 경우도 있겠지만 이미 1차 구매자가 결함이 생긴 제품을 팔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미 소유권을 양도한 1차 구매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몇몇 브랜드는 2차 구매자에게도 워런티를 보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의 소비지형의 특수성을 고려한 결과이지, 대부분 제조사는 2차 구매자에게 워런티 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두자.
※검정으로 채색된 부분은 1년 미만이거나 워런티를 따로 표기하지 않음
※상기된 워런티 기간은 제조사별로 다를 수 있음
4. 정식 디스트리뷰터(배급업자)를 거치지 않은 제품
해외배송 혹은 유학, 여행 중 구매와 같이 국내 디스트리뷰터를 거치지 않은 제품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것은 디스트리뷰터의 판단에 따라 워런티를 적용하기도 하고 유상수리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5. 유상수리의 기준
유상수리 서비스 역시 해당 브랜드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하나다. 무상수리기간이 끝났거나, 워런티 규정에서 벗어난 제품, 혹은 소비자 과실이나 사고 등으로 제품이 파손되었을 때 제조사는 제품을 유상으로 수리한다. 교체되는 부품은 소비자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는데, 여기에 회사별로 공임이 추가된다.
오해와 해명
소비자와 판매사 사이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소비자의 오해 유형은 다양한데,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값비싼 프레임에 대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어떤 사람들은 자전거가 비쌀수록 더 튼튼하고 수명도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전거가 비싼 이유는 레이스에서 보다 빠른 기록을 내기 위함이지, 수명이 더 길어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전거를 홍보하는 문구 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무게대비강성’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같은 강성을 유지하면서도 무게를 더욱 많이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지 내구력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값비싼 경기용 자전거는 오래 타기 위한 물건이 아니라 레이스에 승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머신이라는 사실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라이프 타임 워런티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앞서 설명했듯 이 개념은 프레임을 포함한 모든 부품은 기대수명이 있으며, 이 기대수명까지 제품의 성능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지, 사용자가 평생 탈 수 있게끔 보장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슷한 의미로 티탄이나 크로몰리를 평생 탈 수 있는 자전거라고 착각하는 라이더도 있는데, 이 역시 기대수명이 있다. 한마디로 평생 탈 수 있는 자전거는 없다는 것이다.
풀서스펜션 프레임의 스윙암 부분과 프론트 혹은 리어쇽, 휠셋과 같이 베어링과 완충장치가 들어간 파츠는 메인터넌스(정기점검) 기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만약 제조사에서 권장하는 정비주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결함이 생길 경우, 워런티 기간 내에 있어도 무상수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거친 라이딩을 즐길수록, 그리고 라이딩을 반복적으로 많이 하는 라이더일수록 정비주기를 엄수하는 편이 좋다.
영수증과 워런티 카드는 반드시 보관해두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영수증 또는 워런티 카드는 소비자가 해당 제품을 정식으로 구입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것은 1차 구매자로서의 권리를 온건히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뿐 아니라, 해당 제품이 언제 판매가 되었는지 워런티 기간을 따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영수증이나 워런티 카드 외에도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정품등록제를 실시하는 곳도 많다.
제조사 혹은 디스트리뷰터는 제품을 파는 것뿐만 아니라 사후서비스까지 같이 판매한다. 따라서 판매자는 소비자와 약속한 권익을 존중할 의무가 있지만, 결국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는 소비자 자신이다. 판매회사는 자신의 의무와 한계를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소비자는 이 규정에 의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책임이 있다.
일부 디스트리뷰터는 국내의 A/S풍조와 제조사가 내놓은 국제 워런티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영미권에서 생각하는 서비스의 개념이 국내와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와 판매사 간에 불필요한 갈등 관계가 생기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우리는 최대한 고객의 입장에 서서 제조사를 설득한다. 우리 역시 한국인이고, 한국 소비자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
구매자와 판매자는 경쟁관계도 아니거니와 ‘갑’과 ‘을’ 사이도 아니다. 이들은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다.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고, 판매자는 구매자가 지불한 만큼의 가치를 제공한다. 자전거로 연결되어 있는 한, 이 둘은 일종의 파트너이자 한국의 자전거 문화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소비하는 두 개의 커다란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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